세상에는 복음에 나오는 부자도 많고 라자로의 모습을 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에 라자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늘진 어두운 곳에서 아무런 인기척 없이 홀로 고통받는 이들은, 화려하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가려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부자 역시, 자신의 화려하고 편안한 삶에 취해 대문 앞의 라자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두 인물을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이를 우리의 ‘외적인 삶’과 ‘내면의 삶’으로 나누어 묵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자’의 모습을 원합니다. 화려한 삶을 살거나, 혹은 겉보기에 치중하며 살아가는 이들 중 상당수는 정작 자신의 허기지고 병든 내면을 보지 않으려 하거나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내면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더 많이 채우고 더 편안하게 살면, 내면의 상처쯤은 가려질 것이라 믿습니다.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면, 아예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남기 위해 물질 적인 것에 치우치고 어쩌면 남들에게 보여지는 화려한 '부자'의 삶을 쫓느라 내면의 절박한 외침을 철저히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 안의 '라자로'는 깊은 병이 들어 상처투성이인 채로, 마음의 대문 밖에서 은총과 위로의 부스러기라도 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는 걸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푸르르다고 착각할지 모르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 내면은 세상의 성취와 물질로 상처를 덮은 채 바짝 메말라가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경고한, 사막의 덤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번듯한 겉모습만 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그늘진 곳에서 홀로 앓고 있는 '라자로'의 굶주림과 고통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복음 속 라자로가 고통 속에서도 단 한마디의 불평이나 도움의 외침을 내뱉지 못한 것처럼, 때로는 우리의 내면 역시 상처가 너무 깊고 삶이 고단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것을 기도로 꺼낼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고통받는 우리의 영혼을 한 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이 ‘하느님께서 도우신다’인 것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가 다시 생명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도록 기꺼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허기지고 병든 내 안의 라자로를 더 이상 모른 척 버려두지 맙시다. 화려한 외면으로 내면을 가리려는 헛된 시도와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상처받은 내 모습을 주님 자비의 물가로 데리고 나아갑시다. 우리가 헐벗고 가난한 내면을 주님 앞에 온전히 드러낼 때, 우리는 비로소 겉만 푸르른 척하는 사막의 덤불에서 벗어나, 주님께 굳건히 신뢰를 두고 절대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긴 나무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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