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고 본당 공동체에서 함께 봉사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봉사자로서 만이 아니라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생활에서 자칫 듣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면 처음 시작부터 바쁜 이민 생활 안에서도 이웃과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며 땀을 흘리신 많은 봉사자들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가꿔온 공동체입니다.
물론 때로는 완전하지 못하고 분열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결국에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이 공동체에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봉사자들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공동체안에서 하느님의 손과 발이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피정을 시작하는 이 미사에서, 우리는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왜 봉사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봉사가 어떻게 그저 피곤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될 수 있는지 함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 26장의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엄격한 규정과 법규를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체크리스트를 지우듯 의무만 다하는 기계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느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규정을 지키는 것의 본질은 ‘온 마음을 내어주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돌아보면 분명히 여러분들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본당에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아까운 시간을 내어 놓아야 하고, 토론토 교통에 왔다 갔다 운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해야 하고, 육체적인 피로를 감수해야 하며, 때로는 내 고집과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희생이 따릅니다.
우리는 흔히 ‘희생’이라고 하면 손해를 보거나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고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이 들고, 때로는 봉사를 왜 하는지 회의감이 들고 열심히 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봉사하는 것은 사회에서 남는 시간에, 무엇인가를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서 volunteer/자원봉사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희생은 완전히 다른 뜻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희생을 뜻하는 단어 ‘Sacrifice’의 라틴어 어원은 ‘Sacrum facere’, 즉 ‘거룩하게 만들다’ 라는 뜻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수녀님이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썩어가는 환자의 고름을 맨손으로 짜내고 상처를 닦아주고 계셨을 때, 그곳을 방문한 한 기자가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질겁하며 말했습니다. “수녀님, 저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이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저도 백만 달러를 준다면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렇게 열심히 죽어가는 이들, 가난한 이들을 돌봐서 그곳에 그런 사람들이 더 이상 없게 되었을까요? 결과에 연연했다면 성녀는 당신의 일이 실패했다, 시간 낭비였다고 하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대로 오직 ‘사랑’ 이 당신을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돈이나 명예, 결과에만 연연하는 의무감만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우러나온 희생만이 우리의 평범한 노동을 ‘거룩한 봉사’로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본당 부엌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소공동체 모임을 위해서 집을 치우며 준비하고, 전례를 준비하고, 회합을 이끌며 흘리는 그 남모르는 땀방울과 희생이 바로 여러분의 삶과 우리 본당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사랑의 끝,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엄청난 도전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봉사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선의로 한 일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봉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그 관계의 어려움조차도 사랑으로 끌어안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의 사랑의 대상을 가려낼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가장 닮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수고로움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웃을 돌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실수 없는 완벽한 인간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는 교우까지도 품어 안는 그 넓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함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이 희생적인 사랑을 끝까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그릇이 비어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사랑을 퍼줄 수 있겠습니까?
나의 봉사가 무의미한 의무와 메마른 행위에 그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그 사랑을 채우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은총의 통로가 바로 오늘 하루 일정의 핵심인 ‘소공동체’와 ‘복음 나누기’입니다.
복음 나누기는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나 세상 얘기를 하고 음식을 나누는 친교의 자리도 아닙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읽고 들으며 내 삶을 나눌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심을,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희생을 알아갈 때, 비로소 나도 이웃을 위해 나의 작은 희생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 본당이 올 한 해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크게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대단한 기적을 찾거나 멀리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여 말씀을 나누는 그 자리, 서로의 부족함을 덮어주며 봉사하는 그 땀방울 속에 하느님은 이미 우리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복음 나누기를 통해 예수님과 대화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될 때, 여러분의 모든 봉사는 억지로 짊어지는 짐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가장 아름다운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모두 그 가슴 벅찬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다시 기쁘게 희생하고, 거룩하게 사랑하는 참된 봉사자로 거듭나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다 함께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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