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만들어 내는 공장에 가보면, 아무리 정교한 기계를 써도 가끔 불량품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때 공장의 품질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 불량품을 어떻게 합니까? 잘 안보이게 제대로 된 물건들과 섞어서 나가게 하지 않고 폐기 처분합니다. 만약 공장에서 잘못 나온 물건을 폐기하지 않고 정상 제품처럼 시장에 내다 판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화를 낼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시장의 논리에서는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을 버려야만 '공평'한 것이 맞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향해 이렇게 불평합니다.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원망을 했을까요? 사람들은 하느님을 세상의 엄격한 '품질 관리자'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흠집이 난 악인은 마땅히 즉각 폐기 처분되어야만 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회개하고 돌아서면 살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불량품을 버리지 않고 다시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에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불공평함'이었던 것입니다. 잘못 나온 물건을 폐기하지 않고 안고 가시는 하느님이 답답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세상의 잣대대로 공평하게 불량품을 모조리 폐기 처분하셨다면, 과연 지금 이 자리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저마다 크고 작은 결함과 죄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보시고 곧바로 폐기 처분하지 않으셨기에, 그 하느님의 은혜로운 '불공평함'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숨을 쉬고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는 규격에 맞춰 버려야 할 상품이 아니라, 당신의 숨결이 닿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율법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불량품'으로 낙인찍어 가차 없이 잘라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욕하는 것조차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쓸모없다며 욕을 하는 것은, 곧 내 잣대에 맞지 않는 그 사람을 '불량품' 취급하여 내 마음에서 폐기 처분해 버리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불량품 같은 나를 버리지 않고 당신의 자비로 당신의 뜻에 맞게 고쳐 쓰시듯, 우리도 이웃의 흠집을 용서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타인의 결함을 보며 분노합니다. 왜 저런 사람을 가만두시냐고,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며 하느님을 향해 원망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본당의 올해 사목 표어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봅시다.
"크게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타인을 단죄하기 위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며 크게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량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 곁에, 그리고 여전히 수많은 결함을 가진 나 자신 곁에, 하느님께서 이미 가장 가까이 다가와 친히 우리를 다시 빚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우리를 살리신 하느님의 그 따뜻하고 자비로운 '불공평함'에 깊이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내 곁의 형제자매들을 세상의 잣대로 폐기 처분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너그럽게 품어 안고 화해하는 은총의 시간을 보내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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