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가끔 진정성이 안 느껴지는 대답을 들으면 영혼 없는 대답을 한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쓰는 말이기 때문에, 오늘 요나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말도 영혼 없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정말 '영혼 없이' 억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니네베는 사흘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도시라고 하는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다니며 하는둥 마는둥 한 것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는 말도 회개하라는 따뜻한 당부도 없이, 가기 싫은 티를 내며 대충 던진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기적 하나 보지 못했음에도, 그 영혼 없는 말 한마디에 즉시 베옷을 입고 단식하며 회개합니다.
반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요나보다 더 큰 분', 곧 사랑과 진리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직접 곁에 오셨는데도 그들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마을을 다니시며 가까이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시며 행하신 많은 기적과 치유를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않고, 오히려 더 확실한 표징을 보여달라며 끊임없이 증거만 요구합니다. 마음이 굳게 닫혀버린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이들도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저들의 닫힌 마음은 억지로 열지 않으셨을까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허락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문을 폭력적으로 부수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풀 때까지 밖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주시는 분입니다. 복음 속 사람들은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은총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비추어 봅니다. 낯선 캐나다 땅에서 자리 잡고, 가족들 돌보며 하루하루 치열하게 이민 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마음도 모르는 사이에 굳은살이 박이고 딱딱해질 때가 많습니다. 힘들고 억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확실한 기적'이나 '눈에 띄는 시원한 해결책'이라는 표징을 요구하곤 합니다. 내 뜻대로, 내 시간표대로 하느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정작 내 마음의 문은 꽉 잠가둔 채 왜 응답이 없으시냐고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그 영혼 없는 목소리를 통해서도 회개의 은총을 베푸셨던 하느님입니다. 내 삶에 어떤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일터에서 겪는 작은 위로, 가족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이 고단한 타국 생활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미사에 나오는 우리 교우들의 모습 속에 하느님은 이미 와 계십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극적인 기적을 구하는 대신, 내가 꽉 쥐고 있던 고집과 완고함의 빗장을 조금씩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일상의 작고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이미 내 곁에 아주 가까이 와 계신 하느님의 미세한 숨결을 알아채고 응답하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아무리 영혼 없어 보이는 말이라고 해도 형제 자매들을 통해서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는 주님께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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