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소통하기 힘든 벽' 같은 사람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고, 누가 봐도 잘못된 판단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몰라서 저러나?" 싶다가도, 나중에는 그 이유가 '자존심' 때문이거나,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아집'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내가 틀렸다'는 말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거나 한집에 사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관계가 단절되고, 결국 그 고집은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감옥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영적 고집에 사로잡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맏아들은 "가서 일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습니다."라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가겠습니다."라고 아버지의 말에 순명 하는 것과 같이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했고, 겉으로는 누구보다 하느님께 "예, 예" 하고 대답하는 모범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믿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인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회개하며 삶이 바뀌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의로움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의인'인 우리가 생각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심 때문입니다: 대단한 집안이나 스승의 제자가 아니었던 예수님이나 광야의 요한이 하는 말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온 권위와 지식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완고함은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문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분명하게 말씀 하십니다. 이는 세리와 창녀가 도덕적으로 더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생각을 바꾸고 뉘우치며 방향을 돌릴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영적 위험은 '죄를 짓는 것' 그 자체보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고집을 피우는 자존심이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곧 믿음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사람과도 함께 살기 어렵지만, 오늘 복음이 보여주듯 예수님과 관계 맺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 하는데, 우리가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면 그 은총이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안에 수석 사제와 원로들 같은 모습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이 나의 잘못을 지적할 때, 욱하는 마음에 귀를 닫아버리지는 않습니까? 명백한 진실 앞에서도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버티며 상대를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매일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이미 잘하고 있다"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인은 결점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굳은 고집이 꺾이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구원이 시작됨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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