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은 빚을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채권자를 더 사랑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더 큰 일을 해주거나 도와주거나 빚을 탕감해 준다면 별로 많이 도와주지 않은 사람에게 보다 더 감사하고 나중에 더 베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시몬과 죄인인 여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대합니다. 누가 봐도 여자가 예수님께 더 극진히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여자가 바리사이보다 더 큰 죄를 짓고 더 많은 죄를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죄의 양이 아닙니다. 죄의 양이 중요하다면 가서 죄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어야 겠지요.
바리사이도 분명히 하느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맞아들이지 않은 것도 아브라함을 본받아 손님을 하느님을 모시듯이 해야 하는 바리사이는 분명히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자신은 죄인인 그 여자보다 더 낫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느님과 관계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바리사이 눈에는 자신이 아니라 그 여자만 죄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다가간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비우며 아무리 작은 죄라도 주님 앞에서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뉘우치지 않으며 대충 그냥 넘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지요. 물론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이웃을 판단하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한번 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뉘우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사랑을 보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진정한 치유와 자유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죄인을 멀리 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그 여자와 같이 다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온전한 삶의 변화는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고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 해도 그 여자와 같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여자가 사람들의 눈총을 상관하지 않고 용기를 내 예수님께 다가 갔듯이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더욱 주님을 닮은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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