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누가 어떤 일에 대해서 사실을 말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정해져 있는 것이 없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 말이 믿을 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판단되기도 합니다.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간 목자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목자들이 자신들이 들은 소식을 가지고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나, 아니면 왕궁으로 갔다면 아마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볼품없고 천한 사람들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알려 주실리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나 대사제 같은 사람이 가서 메시지를 전했다면 분명히 중요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과 만남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을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 그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목자들이 찾아와서 자신들이 들은 말을 전할 때 그들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놀라워하시면서도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시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십니다. 볼품없는 목자들과 처음에 찾아온 가브리엘 대천사의 말을 어머니께서는 같은 모습으로 듣고 계시는 것이지요.
서로 판단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반응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시지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평소에 침묵하지 않고 시끄러운 세상에만 나가 있다면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요한 밤의 침묵속에서 태어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침묵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과 머무를 때 성모님과 같이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에 먼저 반응만 하며 성모님과 같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바쁘고 빨리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그럴 새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세상일수록 더 침묵이 필요합니다. 침묵하며 들을 줄 모르고 인내할 줄 모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세우고 판단하게 됩니다. 겸손이 하느님을 따르는데 가장 중요한 길인데 자신을 내세우는 삶으로 인해서 성모님께서 마음에 간직하신 평화와 기쁨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목자들과 같이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듣고 되새기고 침묵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과 비교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머뭇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천사의 방문 때 대답을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목자들도 천사의 말을 듣고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침묵하며 인내하고 되새기며 기도하는 삶은 머뭇거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바로 기쁘게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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