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 라는 1994년 도에 나온 영화가 있는데 아마 보신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카데미상을 6개나 받은 영화이기도 하지요.
영화 중에 어느 한 장면에서 포레스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하고서 집에서부터 갑자기 뛰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집 앞에 길까지, 그리고 계속 뛰어서 마을 끝까지, 주 끝까지 그리고 결국 태평양까지 뛰지요. 그리고 나서 돌아서서 다시 대서양까지 뛰고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계속해서 뜁니다. 먹고 자고 화장실 갈 때만 빼고 계속해서 뜁니다. 그래서 티비에도 나오고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방송국 기자들이 옆에서 뛰면서 왜 뛰는가, 무엇을 위해서 뛰는가 물어보니까 포레스트는 그냥 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그의 뒤에서 뛰는 사람들이 생겨났지요. 3년 2개월 14일 16시간을 뛰다가 사막 한가운데서 갑자기 그는 멈춰 섭니다. 그리고 뒤에 뛰던 사람들을 돌아보자 그 사람들은 포레스트가 중요한 말을 할 것이라고 하며 서로 조용하라고 합니다. 포레스트는 “나는 이제 많이 피곤합니다. 집에 갈 생각입니다.” 하고서는 어리둥절하고 있는 이들 사이로 걸어서 집으로 갑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당황해 하지요. 그의 뒤에서 뛰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포레스트가 갑자기 떠나가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쫓아 뛰어다니는 많은 것들은 어떻게 보면 포레스트와 같습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향해 가는 것 같아서 열심히 쫓아가지만 결국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명예이든, 돈이든, 힘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어느 순간에 세상은 ‘자 이제 여기 까지야’ 하면서 열심히 따라서 뛰던 우리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고 다른 플랜도 없이 그냥 끝나는 것이지요. 참으로 허무하지 않을까요? 세상의 것은 그렇게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과 힘을 다해서 그러한 것들을 쫓아 뛰어도 결국에 공허함만이 남을 뿐인 것이지요. 닭 쫓던 개와 같은 모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던 사도들을 보면 그러한 세상의 습관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께서, 죽은 줄만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부활을 통해서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포레스트를 따라 뛰던 사람들과 같이 세상에서 분명히 뭐가 있을 줄 알고 따라 다녔는데 그렇게 떠나 가시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하는 모습으로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하는 것과 같이 너희의 길은 여기 까지라고 하며 그들을 버리고 그냥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야 보호자 께서 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당신의 승천으로 성령을 보내시며 교회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길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세상의 길이 언제나 부딪히는 막다른 골목은 없는 것이지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당신의 승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의 말을 생각해 보면, 분명한 희망의 말씀인 것이지요. 이제 다 끝났으니 너희 갈 길을 가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지내고 있는 희년에 우리가 진정한 희망의 순례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 순례의 길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하는 발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곳이 저 멀리 있는 어딘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향하는 발 걸음은 형제 자매들을 향해야 합니다. 희망은 내가 바람으로서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희망은 이웃과 나눌 때 더 우리 삶에서 더 커지고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즉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행위 자체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은 그들 마음에 영원한 곳을 향한 희망을 더 크게 하고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이 흔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포레스트가 3년을 넘게 뛰면서 무엇인가를 바라던 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은 결국에 그는 자신을 위해서 뛰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던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뛰고 싶어서 뛰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그렇게 따라 뛰었지만 포레스트는 그 누구에게도 희망이 되려는 생각도 없었고,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던 이들에게 그들도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었겠지만 결국에 뛰기를 멈추고 집으로 간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것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강림 후에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사도들이나 그들과 같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우리들도 스스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희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형제 자매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을 가지도록 그들 위에 서서 가 아니라 옆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은 포레스트와 같이 자신만을 위해 뜁니다. 그들을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신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을 위해 뛰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사도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제 가서 당신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죽음까지 굴복시키신 엄청나게 큰 하느님의 힘과 강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주님의 강복이 우리 모두에게도 머무를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우리의 마음과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희망으로 채울 것이고, 주님안에서 그 희망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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