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나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외치는 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갑니다. 소리를 막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소리가 전달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군중들을 가르치실 때 산 위나 호수 가에서 가르치셨고 생각해 보면 소리가 막히지 않고 잘 전달될 수 있는 곳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사람의 목소리는 그 에너지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벽이나 다른 장애물들을 쉽게 통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장애물 나름이겠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소리가 전달될 수 있는 거리는 짧아지고 점점 알아듣기도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조용하지 않고 다른 소리가 있다면 목소리가 전달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교실이나 강당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가끔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은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의 소리가 방해 받지 않고 잘 전달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광야에서 그리스도에 관해서 외쳤을 뿐만 아니라 당신 마음이 그러한 광야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겸손한 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반면에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마 많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자존심부터 시작해서 음식이나 물질적인 것 등, 많은 것을 향한 욕심과,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 쉴 세 없이 틀어 놓고 있는 티비나 유투브, 게임, 필요 이상의 모임과 오락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벽을 이루고 있고 하느님께서는 한쪽에 우리는 다른 쪽에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조용하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가 하느님에 관해서 말한다고 해도 그 많은 장애물을 통과해서 형제 자매들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듣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말한다고 해도 형제 자매들이 들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런 장애물들이 솟아올라 있는 것을 그냥 둔다면 기도가 안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백날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도 없고 마음에 평화도 없으며 기도한다는 것은 부담만 되고 힘들기만 한 것이지요.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 광야를 만들어 가야 하고, 우리의 마음을 광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도록 하는 장애물들이 무엇인지 알고 한꺼번에 가 아니라 하나씩 없애 가야 합니다. 한꺼번에 없애려고 하다가 그 자체가 부담이 되고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도 쉬운 것부터 하나씩 없애 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길이 내 마음에 장애물들을 낮추는 길이며 하느님의 말씀과 형제 자매들의 말에 더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조용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이 잘 들릴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리고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안에 머물며 인내하고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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