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팔아 넘긴다는 말을 할 때 자신이 그 물건의 소유자라야 합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길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받아들이는 삶의 기본 지식입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팔아넘겨서 이익을 챙긴다면 범죄를 짓는 것이지요. 특히 사람을 팔아 넘기는 행위는 어느 나라에서도 혐오하는 범죄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종의 목숨 값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종도 아니고 소유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것인 마냥 팔아 넘깁니다. 그러한 유다의 모습에서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많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소유물 들의 가치는 그 주인의 삶을 어떻게 즐겁게 하거나 충족시키는 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장난감을 원해서 사주면 아이에게 그 장난감은 자신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처음에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겨워지고 멀리하게 되면서 가치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어른 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지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자신이 섬겨야 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에게 가치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받은 액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때로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가치는 그 보다 더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때 더 나은 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함께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주식이 오르내리듯이 사람들의 삶에서 오르내립니다. 어떤 때는 성당일에 열심히 하고 기도 모임 같은 것도 합니다. 하지만 또 바쁜 일이 있으면, 어떤 가족이나 지인들과 모임이 있으면 기도는 뒤로 밀려나고 미사도 밀려나기도 합니다. 여유가 좀 있으면 조금씩 어려운 이웃을 돕지만 때로는 여유가 없다고 하며 외면합니다. 그 밖에도 삶의 여러 모습에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삶에 차지하시는 공간은 줄어 들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몸은 예수님과 같이 있지만 유다와 같이 마음이 완전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더 이상 내 삶을 충족시키는 가치를 찾지 못하면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것이지, 우리의 세상 삶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허락하신 탈렌트를 잘 사용해서 세상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의 삶의 충족을 원한다면 유다와 같이 실망하고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세상의 은전을 위해서 예수님을 팔아 넘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세상을 예수님 위에 선택하는 모습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모습이 반복되다 보면 유다와 같이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은 하지만 결국에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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