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성가정은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지만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에 정착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천사는 세번이나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말씀하셨고, 요셉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가 더 하느님께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요셉보다는 성모님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성모님께는 천사가 꿈이 아니라 직접 나타나셔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신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인사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이 성모님의 입장에 있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요? 아니, 내가 더 중요한데 왜 나 한테 말씀을 하시지 않고 요셉에게 말씀을 하셨을까? 요셉이 정말 천사의 말을 들은 것일까? 등등, 그런 생각들로 의심을 하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하느님의 아들을 당신이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피신을 하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요셉에게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느냐, 악몽을 꾼 것이 아니냐 하고 따지고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요셉이 이끄는 대로 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을 침묵 중에 따르십니다. 그만큼 요셉을 향한 믿음이 확실 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굳건한 믿음은 단순히 '남편 요셉'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넘어, 요셉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숨은 섭리'를 꿰뚫어 보는 영적인 눈이 성모님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직접 나타나 구세주의 잉태를 알렸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 순간과 달리, 한밤중의 이집트 피난길과 아무 연고도 없는 변방 나자렛에서의 정착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고단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품은 어머니에게 주어진 삶 치고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왜 천사가 내게는 직접 오지 않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요셉의 꿈과 판단을 통해 드러나는 것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성가정을 이끌고 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다 보면 이집트나 나자렛 같이 전혀 계획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낯설은 현실에 던져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 왜 내 기도는 직접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왜 일이 이렇게 꼬이기만 합니까?"라며 흔들리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불평하는 대신, 묵묵히 요셉의 이끎에 순명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직접 들려오는 뚜렷한 응답이 없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더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상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고 계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인간적인 답답함이 계속될 때, 오늘 복음 속 성모님의 침묵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심과 불평을 잠시 거두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과 내 곁의 사람들을 통해 조용히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우리가 성모님처럼 침묵하며 신뢰와 순명으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일에 충실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우리의 작은 '나자렛'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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