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년 동안 이 동네 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집을 짓는 공사 현장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더 이상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 새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새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그 자리에 있던 옛 집을 먼저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낡은 집을 다 부수고 치우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새 집을 짓고 싶어도 들어설 '빈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회개'도 이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종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인 만 탈렌트 앞에서 주인에게 엎드려 빌며 말합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가 엎드려 애원했으니 자신의 처지를 알고 겸손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인이 빚을 탕감해 준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겸손이 아니라 처음에 그 빚을 지게 되었던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고 주인의 엄청난 자비에도 그 옛 마음이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옛 마음이 그렇게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으니, 주인이 거저 베풀어준 '엄청난 사랑과 용서'가 들어갈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없으니, 동료의 아주 작은 빚인 백 데나리온조차 용서해 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리 없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진짜 겸손한 모습은 다니엘 예언서에 나오는 아자리야의 회개하는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펄펄 끓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그는 이제 완전히 부서진 이스라엘의 모습, 제물을 바칠 성전마저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모습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마음과 겸손한 정신을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처럼 받아 주소서." 라고 하며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기만하던 옛 마음이 부서졌기 때문에, 다시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진정한 겸손은 내 옛 모습이, 마음이 부서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던 욕심이나 이기심, 이웃을 미워하고 하느님을 기만하는 모습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물론 첫째 종과 같이 사람들의 눈에는 겸손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고 겸손한 척만 하는 본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 같이 형제 자매들과 관계 안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 집을 조용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부수는 방법은 없습니다. 옛 집을 부수는 것은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때로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이 우리의 삶이 무너져야 할 때도 있고, 큰 고통과 어려움이 올 때도 있습니다. 아자라야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무너진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인 것이지요. 그러나 두렵기 때문에 많은 이들을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냥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럴 듯한 모습으로 가리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부서져야 하는 순간들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느님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 수 있기 위함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내가 쌓아오고 내가 지켜온 마음이 부서질 때, 그 자리에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그리고 진정한 겸손이 새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마음에 지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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