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두 명의 특별한 아기의 탄생 예고를 들려줍니다. 제1독서 판관기의 ‘삼손’과 복음 속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하게 닮아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났고, 태어날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삼손과 세례자 요한, 오늘 우리는 이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다는 것’ 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해 봐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 나지르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세상과 단절되어 거룩하게만 사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봉헌’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천사는 삼손에 대해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라고 예고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바쳐진다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의 소유물로 지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필요하신 곳에 쓰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쓰여지는 도구가 되는 것, 그것이 봉헌된 자의 모습인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완벽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들의 나약함, 약점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을 하느님께서는 숨겨 주시거나 덮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삼손을 보면, 그는 엄청난 힘을 지녔지만, 성격은 충동적이었고 나지르인의 맹세를 깨뜨리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는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사제였지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점이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함과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신비이며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오늘 말씀은 먼 옛날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언자나 판관도 아무런 이유 없이 부름받지 않았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아무 이유 없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 여러분이 겪고 있는 상황 모두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나는 신자다"라는 사실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쪽만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왜 당신께 바쳐진 사람으로 부르셨습니까? 저를 통해 당신의 백성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를 돕고자 하십니까?"
우리가 그 구체적인 이유를 모른다면,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협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삼손과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마음을 묵상해 봅시다. 내가 비록 부족하고 불완전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나를 쓰고자 하십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은총의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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