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판관기의 말씀에서 정말 대단한 사람은 적을 물리친 입타가 아니라, 입타의 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는 아버지가 먼저 마중 나오는 딸을 보고 충격에 빠진 것과 달리 입타의 딸은 주님과 한 약속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당연한 듯이 받아들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왜 자신이 목숨을 내 놔야 하느냐, 아버지는 생각도 없이 왜 그런 약속을 했느냐 등등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두달이라는 말미를 줬다면 죽지 않기 위해서 도망이라도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한 약속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을 보면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 보다도 하느님과 약속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에는 나에게 어려움이나 손해가 없는 한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해도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고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요. 모든 것을 내어 놓지 않고 한계를 둔다면 당연히 하느님과 관계는 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자매들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아들에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각자 자신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러 가는 선택을 합니다. 심지어 소식을 전하는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지요. 또한 예복을 챙겨 입지 않고 온 사람도 오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미사라는 천상 잔치에 초대하시는데, 많은 이들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며 응답하지 않습니다. 일하러 가고, 놀러 가고 모두 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온다고 해도 몸만 왔다 갔다 하고 마음은 다른데 가 있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마음의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것이지요.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하면 준비하는 것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 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당연히 하느님과 관계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내 생각과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면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이 가장 중요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약속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 놓는 입타의 딸보다 못한 모습으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모든 것이 되어야 하고 삶의 중심이 되시는 것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 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을 것이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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