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한국 뉴스를 보면 아마 많은 분들이 속이 터지고 답답할 것입니다. 산불도 그렇지만 정치하는 사람들과 재판하는 판사들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이 헌법 재판소라는 것이 따로 없지만 대법원이 있고 지방 법원이나 주 법원에서 지면 마지막에는 대법원에 항소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국 대법원은 헌법을 해석하고 판단을 내리는 마지막 기관이기도 합니다.
한국도 지금 보면 일부 그렇지만 미국도 대법원 판사들을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에 임명하는 판사들은 대부분 대통령과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느 대통령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할 판사를 그 자리에 앉힐 까요? 그리고 미국 대법원 판사들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어떤 판사들이 임명되는 가에 따라서 아주 긴 시간 동안 임명한 대통령의 성향을 유지합니다. 아무튼 헌법은 국가의 기반이며 모든 법의 기준이 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어떤 판사인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을 가지고도 누가 판단하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 질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법이기 때문에 여러 다각도로 해석해서 적용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그런 헌법이나 다른 법이 있다고 해도 절대 적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죄가 될지, 유죄가 될지, 형량은 얼마나 될지 판사가 판단하기 전에는 알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는 우리를 심판하는 권한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권한이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판사들과 같은 심판자라면, 그래서 하느님의 법의 해석에 따라서 판결이 항상 달라진다면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을 까요? 어떻게 자비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기분이나, 생각이나 다른 어떤 영향을 받아서 그때 마다 판단이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법은 절대적인 것이지 해석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심판자인 예수님께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은 자비입니다.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지었든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판단하시는 것은 당시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심판은 올바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아니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힘들게 만들 수 있을 까 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성향이기 때문에 나에게 이로운 판단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께서는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무엇이든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시는데, 사람이 뉘우치지 않고 변하려고 하지 않으며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과 같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심판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숨을 수 없습니다. 예외 없이 누구나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자비는 얼마나 죄를 짓지 않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당신의 사랑에 의지하며 죄를 뉘우치며 살아왔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생활안에서 항상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께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심판날에 분명히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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