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우리가 아는 많은 일들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아 사회에 나가서 활용하는 것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직장에 취직해도 한 번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점점 높은 자리로, 더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는 자리로 올라가게 됩니다. 의과 대학을 나와서 바로 수술실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지 못합니다. 이론으로 배운것을 실습하며 익히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지요.
오늘 창세기 말씀에서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방주를 만들고 갖가지 짐승들과 함께 배에 오르고 나서 40일 동안 비가오고 150 일동안 물이 불어났으며, 다시 150일동안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산봉우리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부터 40일 후에 까마귀를 날려 보냅니다. 그리고 이래를 더 기다렸다고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마른 땅을 밟을 때까지 그는 방주 안에서 인내로서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방주가 컸다고 해도 크루즈와 같이 편한 곳,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안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렸기 때문에 그가 땅을 밟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번제물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 번제물이 아니라 노아의 행실과 믿음이 마음에 드셨기 때문에 그가 바친 번제물이 마음에 드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후에 눈먼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나무와 같이 흐릿하게 보였고, 다시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니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손을 얹으셨을 때 실수를 하셨던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치유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 눈이 뜨이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의 경험을 봐도 세례를 받고 하루아침에 열심한 신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배워야 했고, 더 의문이 많아 졌을 수도 있고, 많은 것이 흐릿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들이 더 잘 보이게 된 것이고 지금까지 믿음을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과정은 지금도 진행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뚜렷하게 잘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하느님과 함께 머무른다면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치유한 사람에게 다시 저 마을로, 즉 벳사이다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불행하다고 하시며 티로와 시돈이 마지막 날에 그들 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다시 믿음이 없는 곳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영적 삶에서도 때로는 뒷걸음 질 칠 때가 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하는 자리에 다시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고서도 우리 삶의 벳사이다를 자꾸 돌아보며 완전히 발을 때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도 흔들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을 따르는 길이 우리에게 시간이 걸리고 완전하지 못한 길이지만 죄가 도사리는 곳을 자꾸 돌아서며 그 길을 더 힘들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내하고 당신 만을 믿고 바라본다면 분명히 당신께서 뜻하신 때에 당신의 영광의 나라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주님 안에 머무른다면, 분명히 그 길은 점점 뚜렷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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