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자리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베드로는 그를 요한과 함께 유심히 바라봤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이 눈에 들어올까요?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서 유심히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요?
만일 대화를 하면서 베드로와 같이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라고 했다면,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분명히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불구자에게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가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있었다면 얼마든지 줬을 것이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바라는 것은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없어서 못 주는 것도 있지만, 있는데도 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혹여나 내가 손해를 볼까 봐, 나 살기도 벅차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나 자신이나, 혹은 내가 아직 갖지 못한 더 높은 곳의 '은과 금'만을 향해 있기에, 내 발치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의 아픔을 베드로처럼 '유심히 바라볼' 영적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지갑을 열어 가진 은과 금을 다 내어준다고 한들, 그것이 성전 미문에 앉은 그 사람의 근원적인 절망과 불구자라는 것 때문에 사회와 그리고 하느님과의 단절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세속의 재물은 없었으나,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생명,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꽉 차게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 생명이 흘러 넘쳐 이웃에게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영적 진리입니다.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그들의 내면은 철저히 텅 비어 있었습니다. 자신 안에 희망도, 기쁨도, 예수님도 없었기에 누군가를 살릴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낯선 길동무로 다가오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고,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타올랐고, 눈이 열렸습니다. 그 성체성사의 은총을 통해 예수님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 순간, 그들은 지체 없이 일어나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러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이웃에게 위로와 사랑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내 빈 독을 먼저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매주, 그리고 매일 참여하는 미사가 바로 그 은총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듬뿍 받아 모시고 내 안에 예수님을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우리의 시선은 변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바라보던 이기적인 시선이 이웃을 향하게 되고, 길가에 소외된 이들을 '유심히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생겨납니다.
오늘 나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헛된 은과 금으로 채우려다 정작 영적인 빈곤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먼저 미사를 통해,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전 문을 나서 세상으로 나아갈 때, 아파하는 이웃을 향해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가진 것을 당신에게 줍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말하며 형제 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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