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가장 낮춤을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논쟁을 하면서 높임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얼마나 성경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가가 아니라, 얼마나 낮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더 이상 낮출 수 없을 만큼 낮추시며 하신 말씀을 어떻게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는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 보내든지, 알아듣지 못하니까 무시해 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 필요한 낮춤은 어떤 이론 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필요할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보편 된 모습이어야 하고 그 낮춤을 통해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특히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가장 작고, 아무것도 나에게 해줄 수 없고, 가장 약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보면 힘이 없다고 배척하고 세상에서 쓸모 없다고 합니다.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이 낙태인 것이지요. 아무런 힘도 없고, 자신을 지킬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생명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안락사를 추구하는 세상, 다시 말해서 낮춤을 통해서 병들고 힘없는 이들이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함께 하고 도우려고 하기 보다 부담이 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세상에서 없어지도록 하려고 하는 세상을 보면 낮아진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이 낮아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진다고 하는 십자가는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을 낮추시고 당신 없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을 위해 못박히신 십자가와는 다른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있는 것이지,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면 가장 낮고 힘없고 사회가 필요 없다고 버리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낮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겸손이 없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동문서답만 하거나 오늘 복음에 제자들과 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필요한 은총을 주셨고,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체 성사를 통해 낮춘다는 겸손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의 몸을 받아 먹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해 낮아질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서부터,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부터 낮춤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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