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사람들에게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 동물 보다 인간의 생명이 더 가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가지지 않고 그 대신 애완 동물을 키우는 등, 동물들이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사람보다 더 잘 먹고 자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비록 마귀들이 들어가 물속에 빠져 죽은 돼지들이 애완 동물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 동네에 중요한 경제 수단이었을 것이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예수님께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도 그렇고 돼지가 모두 죽은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한 상대적인 것이지 모든 사람의 생명이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돼지들이 죽음으로서 그 두사람이 살게 되었는데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이 잃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하며 자신들의 마을에서 쫓아내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말씀에서 사라의 행동을 보면 무엇이 중요한지 잊고 사는 사람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질투에 사로 잡혀 아무리 자신의 종이라고 해도 하가르와 그 아들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명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먼저인 것이지요. 그래서 둘은 사라에 의해서 나가 죽도록 버려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살길을 마련해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지금 세상은 낙태와 안락사, 전쟁, 물질 만능 주의 등 세상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생명은 사라가 하찮게 여긴 종의 생명과 같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나 사회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는데, 우리는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단지 사람의 육적인 목숨만이 아니라 영적인 목숨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영양제도 먹고 병원도 다니고 운동도 하며 자신의 육신은 챙기지만 영적인 생명은 하찮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자신 만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영적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형제 자매들을 비난하고, 뒤에서 험담하거나 말로 상대방을 직접 깎아 내리는 등 목숨을 빼앗지 않아도 사라와 같이 그들을 내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아닌 것인데,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방을 죽이는 행동을 합니다. 분명히 큰 죄이고 항상 성찰하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 자매들을 내친다고 해도 오히려 자신의 영적 생명이 큰 타격을 입게 되고 건강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없었다는 것은 돼지들의 경우 만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며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형제 자매들의 생명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며 자신과 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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