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독서인 코린토 1서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구분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먹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아직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아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사가 환자에게 그 사람에 병에 대해서 교과서나 학술지에 나오는 어려운 언어로 복잡하게 설명을 한다면 그 환자는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했지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보다, 시기와 싸움 중에 있는 이들이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육적인 사람’이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당연히 우리도 잘 알다시피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삶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사랑은 시기하고 다투지 않습니다. 감사하고 용서하며 흩어진 것을 모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육적인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에게 떠나지 말라고 붙듭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붙들었을까요? 믿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이라는 분을 더 알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아마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 그분이 가져다 주는 편안함을 붙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만 그 마을에 계속 머무르시면, 아픈 사람도 없을 것이고, 마귀에 들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죽는 사람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붙잡고 싶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눈앞의 고통을 없애 주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기적에 취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젖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이 아니라 어떤 신학적인 이론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하느님이 누구인지 가르치셨다면 도대체 누가 알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육적인 것에 머무른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기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첫걸음일 뿐,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단단한 음식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과 순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첫 걸음을 때고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 육적인 바람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시며 다시 길을 나서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 육신의 병을 고쳐주고 현세의 편안함만을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단한 음식'을 주시고, 하느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께 내 삶의 기적만 일으켜 달라고,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 달라고 떼를 쓰는 육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때로는 십자가라는 단단한 음식을 묵묵히 소화해 내며,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이웃에게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인 사람입니까?
예수님께 다가가는 첫 발걸음을 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을 때고 나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영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미사를 통해서 눈앞의 기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우리도 함께 따라 걸을 수 있는 참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