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이든 감옥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이웃을 해하거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이나 잘못된 사회의 질서에 의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새 일어나는 일의 예를 들어 보면 비행기 탈 때 가방을 부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 마약을 유통하려는 이들이 여행객의 가방의 태그를 때서 마약이 든 가방에 붙여서 보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던 여행객은 자기 이름이 적힌 태그가 있는 가방에서 마약이 쏟아져 나와, 어떤 경우는 몇 달씩 감옥에 있다가 겨우 억울 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런 고통을 받고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보면 정말 억울합니다. 더군다나 비행기 회사에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지요.
사도 바오로도 그가 잘못한 것이나 범죄가 있어서 감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형제 자매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가 억울 하다고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당신이 가야 할 길이라면 얼마든지 견디어 내면서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복음을 정당화 하려고 하거나 억울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 말하기 보다, 복음을 ‘아무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 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토록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한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고, 쇠사슬에 묶이는 고통 속에서도 온전히 지켜내고자 했던 그 '진리의 말씀'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바로 오늘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율법 학자의 대화는 수많은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첫째가는 계명, 즉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오로가 목숨을 걸고 전하고자 했던 복음 역시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바오로가 아무런 잘못 없이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처지조차 기꺼이 견디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두 가지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했기에 억울함 속에서도 그분의 뜻에 순명할 수 있었고, 형제 자매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랐기에 자신의 고난을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오로는 참된 사랑의 실천이 성전에서 바치는 그 어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보다 낫다는 것을 자신의 삶과 옥중의 쇠사슬로 직접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억울한 일들, 내 뜻과는 상관없이 고통과 오해의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하며 나의 정당함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혹은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누군가와 끊임없이 설전을 벌이는 데 에너지를 쏟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를 한 차원 더 깊은 신앙으로 초대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명은 억울함에 마음이 묶여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묶여 있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 곧 사랑의 계명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에게 건네신 이 칭찬이, 오늘 세상의 오해와 억울함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억울함을 넘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나의 삶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우리는 부끄러움 없는 진리의 일꾼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 않는 것 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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