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호수아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신 것과 같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며 그를 통해 요르단 강의 물줄기를 멈추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요르단강을 건넌 백성들의 조상들은 모세를 통해서 갈라진 홍해를 가른 것과 같은 기적인 것이지요. 홍해를 건너며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 되었듯이, 요르단 강을 건너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광야의 삶을 뒤로하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보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 그리고 이번엔 여호수아를 통해서 당신께서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은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이 당신께서 부르신 이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도 인간적으로 볼 때 자신이 사형을 받도록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가지고 조용히 있어야 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가 이웃을 대신해서 죽는 순교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그러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못한 이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용서가 안되고 밉다고 고해성사를 보고 또 보고 하면서도 잘 안되는 것이 용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빛을 탕감 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용서하지 않은 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통해서 생명을 얻듯이 형제 자매들을 향한 용서는 우리와 그들이 삶에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자신의 힘으로 가르려고 했다면,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자신의 힘으로 멈추려고 했다면 가능했을까요? 아무리 힘들게 노력했다고 해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같이 밀려드는 미움의 감정을 메마르게 해서 우리가 자유로 건너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성령의 이끄심이 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불평만하고 마음만 썩히기 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통해서 형제 자매들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어떠한 조건이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고, 가서 당신의 사랑의 증거자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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