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를 복음 벨트라고 합니다. 주일에 몇 천 명씩 예배에 나오는 큰 개신교가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 모든 개신교가 그렇지 않지만 아주 잘 나가는 교회들 중에 Prosperity Gospel, 즉 번영, 풍요 복음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중심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말을 어떻게 이어 가실 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번영과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병이 나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경제적 압박에서 빠져나오고 풍요롭게 될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가 좋아질 것이다.’… 대충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마음 한구석에도 이러한 기대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하면, 하느님께서 내 삶의 골칫거리들을 해결해 주시고 눈에 보이는 축복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혼자 조용히 암산을 합니다. 고통을 피하고 안락함을 누리고 싶은 것은 연약한 인간의 아주 자연스러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미사에 독서와 복음 말씀들은, 우리의 이러한 세속적인 기대에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의 고통이 사라지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 참된 복음이라면,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삶은 그야말로 실패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번영과 풍요를 외치는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바오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거나 믿음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돌에 맞아 죽다 살아난 바로 다음 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 굳세게 만듭니다. 그리고 오히려 당연한 것과 같이 이렇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초인적인 담대함이 가능했을까요? 그 답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에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세상이 주는 평화, 즉 번영 복음이 약속하는 평화는 내 주변의 시련과 문제들이 싹 사라진 온실 같은 안락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거센 태풍의 눈 한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밖에서는 환난과 고통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병고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을지라도, 내 영혼의 닻이 하느님께 깊이 내려져 있기에 겉으로 일어나는 일에 휩쓸리지 않는 내적인 굳건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채웠던 것은 상처 난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님의 평화였습니다.
주님께 고통을 없애 달라, 내 눈에 좋게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달라는 식으로 기도를 한다면 이제 그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는 어린아이 같은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삶에 다가오는 고통과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는 고백과. 세상의 어떤 위협도 앗아갈 수 없는 주님의 참된 평화를 마음속에 부어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성취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십자가 너머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평화가 오늘 우리 각자의 삶과 마음속에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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