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불의한 집사는 자신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고 있지 않고 바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깁니다. 불의한 사람이었지만 상황 판단과 해야 할 일을 바로 하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집사의 불의함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집사의 행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리하게 대처한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도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잘 관리해야 하는 삶입니다. 세상에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느님 것을 관리하는 집사인 것이지요. 위령성월이기 때문에 다시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집사의 자리가 그가 생각지도 않았던 때 주인이 그에게서 빼앗아 간 것과 같이, 우리의 집사자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을 잘 했던 잘 하지 못했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 끝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집사의 역할을 잘 살아가고 있다면 그 끝이 언제이 든지 준비된 삶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특히 준비가 될 수 있도록 영리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복음의 집사와 같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끝이 날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판단해서 할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미루기를 좋아합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나중에 하면 된다 등 안이한 생각으로 세상 삶의 끝을 준비하는 것을 미룹니다. 그러나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내일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일 가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법도 없습니다. 지금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내일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게 산다면, 내일이 와도 또 그 다음날로 미루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냉담을 하면서 다음 주에는 가야지, 다음 달에는 가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1년이지나고 5년이 지나고 몇 십년이 지나도록 냉담을 이어가고 있을까요?
만일 사도 바오로가 그러한 결단력이 없이 대충 적당히 하면서 미루는 사람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다고 해도 그가 한 전교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집사와 같은 판단력과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풍랑이 몰아쳐도, 감옥에 갇혀도, 다른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리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리함은 집사와 같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집사도 자신의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그렇게 대처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작은 일에서부터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선택을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해 나간다면,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가 다가와도 주님의 뜻에 따라 영리하게 대처 할 수 있을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