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혼자 미소를 띄고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질문을 할까요? 아마 ‘저 사람은 좋은 일이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거나; ‘뭐 기분 좋은 일이 있어?’ 라고 질문하지 않을까요? 보통 힘들거나, 마음이 답답하거나, 근심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보면 바오로와 실라스는 옷을 찢기고, 매를 많이 맞고 가장 깊은 감방에서 발에 차꼬를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었다면 과연 우리 입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가 나올까요? 하느님 찬미는 둘째 치고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나올까요? 아마 그런 사람을 보면 정신이 나갔나 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실라스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고서, 더군다나 하느님 때문에 자신들의 모습이 그렇게 되었는데도, 하느님께 기도하며 찬미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맞아서 미쳤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당연히 미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세상의 어떤 것 보다도 확실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보호자 성령입니다. 그들의 육신은 망가져도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을 보호하고 계셨고, 그 보호에 온전히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도 마음으로부터 찬미의 노래와 기도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을 때는 상황이 조금만 틀어져도 근심에 사로잡히지만,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긴 사람은 가장 깊은 감방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찬미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육신을 묶은 차꼬보다, 영혼을 기쁘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보면 진짜 근심과 절망에 빠진 사람은 매를 맞고 갇힌 죄수들이 아니라, 그 감옥의 문을 굳게 잠그고 열쇠를 쥐고 있던 간수였습니다.
간수는 자신이 상황에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지진이 나고 감옥 문이 다 열리고 사슬이 풀렸을 때,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죄수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것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너지자 버틸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때 아마 그도 상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도망친 줄 알았던 바오로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그의 영혼과 가족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다정한 목소리였던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도 간수처럼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너무나 큰 근심에 빛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냥 그 상황에 반응하며 어떤 결정을 하는 것 보다, 조용히 머무르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고 불러 주십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우리의 모든 근심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상황이 변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해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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